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 주장 사건 (문단 편집) ==== 한사군을 요동, 요서로 비정한 조선시대 학자들 ==== 정약용, 한백겸 외에 한사군이 요동, 요서에 있었다고 주장한 학자들이 있으니 나름대로 근거가 있지 않냐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익(실학자)|이익]], [[박지원(실학자)|박지원]] 등이 나름대로 사료적 유물적 근거 등을 통해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박은 당대에 이미 이루어졌다. 주요 포인트는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의 위치와 미천왕의 축출로 인해 밀려난 낙랑군의 위치를 동일시하는 바람에 생긴 오류, 즉 [[낙랑군 교치]]를 이해하지 못해 일어난 오해라는 것이다. >『“외(廆)가 낙랑군을 두어 통(統)으로 태수(太守)를 삼았다.”하였으니, 이것은 별도로 요계(遼界)에 두어, 옛이름을 그대로 칭하기를 마치 후세의 요령(遙領)하는 예와 같이 한 것이지 '''한 나라 때의 옛 군은 아니다.'''』 안정복, 『동사강목』, 「사군고」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낙랑은 진나라 건흥(建興) 초기에 이미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모용씨(慕容氏)가 이를 인하여 내지(內地)에 낙랑군을 두고는 옛 칭호를 모칭(冒稱)하였다. 호삼성(胡三省)이, “모용씨의 낙랑군 및 조선현은 모두 요서군(遼西郡) 유성현(柳城縣) 경내에 있어야 한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척발씨(탁발씨, 拓跋氏 후위(後魏))에 이르러서는 또 요서나 북평(北平) 등지에 낙랑과 대방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모두 한나라 때의 군현과는 서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 단지 그 이름만을 취한 것일 뿐이다. '''중국의 서책에서 혹 요동의 여러 현을 한나라 때의 낙랑 지역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한진서, 『해동역사』, 「지리고4」 여기에 나타난 조선시대의 논박 역시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을 반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내는데, 낙랑군의 위치가 일제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논리를 반박하는 또 다른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위 사료에서 밝히듯이 당대 시기에 이미 조선시대 학자들은 요동, 요서에 나타나는 낙랑의 흔적은 미천왕의 낙랑군 축출 이후에 낙랑군 교치로 인해 나타난 흔적이라는 반박을 제시했다. 즉 낙랑군의 교치 위치가 식민사학자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거짓이며, 이미 조선시대 때 한반도에서 요서로 이동했다는 관점이 존재했음을 나타내는 사료인 셈이다. 이 조선시대의 낙랑군에 관한 논박은 낙랑군을 한반도로 가두는 프레임이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거짓이며 오히려 소위 강단사학자를 공격하는 해당 논리가 현대에 창작된 프레임 씌우기라는 것을 밝혀주는 사료인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